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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고선으로 만든 산·몸을 잃어버린 새… 익숙한 풍경은 없다
  • 게시일 : 202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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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7) ‘시각의 전복’ 시도하는 임선이 작가

 

조각·설치·사진 넘나들며 작업

관람자의 고정된 인식 뒤흔드는

눈으로 보는 것 너머 풍경 묘사

 

‘진짜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

불안을 긍정하는 삶의 풍경 표상

구불구불 휘어진 날카로운 붉은 협곡 단면이 시선을 사로잡는 ‘세 가지 초점 3(Trifocal sight 3)’. 2008년 제작된 작품은 등고선을 따라 오려낸 종이를 겹겹이 쌓아 산 덩어리를 만들어 촬영한 뒤 디지털로 프린트했다.
구불구불 휘어진 날카로운 붉은 협곡 단면이 시선을 사로잡는 ‘세 가지 초점 3(Trifocal sight 3)’. 2008년 제작된 작품은 등고선을 따라 오려낸 종이를 겹겹이 쌓아 산 덩어리를 만들어 촬영한 뒤 디지털로 프린트했다.

임선이 작가는 조각과 설치, 그리고 사진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다.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업은 기법뿐만 아니라 내용과 형식 면에서 다채로운 변주를 거듭해 왔는데, 이런 변주에서 가장 눈여겨볼 특징은 바로 시각의 전복이다. 여기서 전복이란 단순히 뜻밖의 이미지를 던져 시각적 반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실재의 풍경이라고 믿었던 것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시간과 기억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임선이의 작품들은 단일한 의미로 규정되거나 고정되지 않는다. 그의 작품들은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형상으로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불안의 평화’라는 가장 진실하고 깊은 역설을 마주하게 된다.

2003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은신처(Shelter)’는 시멘트로 캐스팅된 선인장들이 바닥에 늘어선 설치 작품이다. 이 회색빛의 선인장들은 더 이상 잘리거나 시들 위험은 없지만, 초록빛 생명력을 상실한 채 굳어버린 형태를 보여준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품은 불안한 현실을 견뎌내고자 생동감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격리하고 무감각해진 현대인의 생존 방식에 대한 은유이다. 2005년 ‘갇힌-섬’ 연작에서도 이 은유는 이어진다. 바다 물길로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단절되고 고립된 섬들은 “도시 속 현대인들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현대인이 처한 실존적 상황을 드러낸다.

2007년 작 ‘붉은 눈으로 본 산수-산의 그늘’ 역시 수천 장의 지형도 등고선을 일일이 오리고 겹겹이 쌓는 수행에 가까운 작업을 통해 제작됐다. 작가의 경험과 신체적 지각으로 추출된 새로운 풍경이다.
2007년 작 ‘붉은 눈으로 본 산수-산의 그늘’ 역시 수천 장의 지형도 등고선을 일일이 오리고 겹겹이 쌓는 수행에 가까운 작업을 통해 제작됐다. 작가의 경험과 신체적 지각으로 추출된 새로운 풍경이다.

 

2007년 작 ‘붉은 눈으로 본 산수’는 임선이 특유의 시각적 전복이 극적으로 드러난 대표작이다. 작가는 인왕산을 수려한 자연 풍경으로 재현하지 않고, 대신 수천 장의 지형도 등고선을 일일이 오리고 겹겹이 쌓아 올리는 수행에 가까운 작업을 통해 솟아오른 산(양각)과 깊게 파인 협곡(음각)이라는 낯선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오롯이 작가의 경험과 신체적 지각으로 추출된 새로운 풍경이다. 작품명에 등장하는 ‘붉은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눈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에 가까운 작업을 하느라 충혈된 작가의 눈이자,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부조리한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흔들리는 눈’이다. 한편, 음각의 협곡을 사진으로 촬영한 연작 ‘세 가지 초점(Trifocal Sight)’(2008)은 관람자의 고정된 인식을 한 번 더 뒤흔든다. 관람자는 실재하는 풍경도, 관념적인 풍경도 아닌 온전히 작가의 눈으로 구성된 풍경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진짜 풍경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풍경은 어느 곳에나 있지만 동시에 어느 곳에도 없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진실일까? 임선이 작가는 줄곧 이 물음을 던지며, 대상을 눈으로 지각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작품을 통해 예리하게 제시한다. ‘흔들리는 눈(Trembling Eyes)’(2013)은 꽃이 담긴 화분을 360도로 미세하게 돌려가며 수십 장을 촬영한 뒤, 이를 한 장의 화면에 겹쳐낸 작업이다. 그 결과물은 대상을 명료하게 포착해서 잡아낸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무수한 잔상이 만들어낸 불완전하고 모호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통해 또 한 번의 시각적 전복을 시도한다. 대상의 실재성과 현실성이 눈에 보이는 차원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포착된다고 그는 믿는다. 그가 명료함을 걷어내고 이토록 모호하고 이중적인 이미지를 재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은 임선이의 작업에서 늘 중요한 요소였지만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시간성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기억이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난다. 사진 연작 ‘유토피아’(2019)는 퇴역 장교인 늙은 아버지의 몸과 그 주변 사물에 새겨진 시간을 보여주며, 오래된 이발사의 주름진 신체와 몸짓 속 사건성을 기억의 이미지로 풀어낸다. 젊은 날의 시간은 희미해졌지만 노년의 몸 그 자체가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진실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시간의 무게는 설치 작품 ‘녹슨 말-숨의 말’(2019∼2021)에서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 작품은 녹슨 철로 제작된 샹들리에가 공간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장면을 보여준다. ‘녹슨 말’은 작가의 표현대로 “무거운 말, 오래되어 낡은 말, 보이지 않는 말”이다. 한때 화려한 불빛을 밝히며 찬란했던 샹들리에는 이제 바닥에 내려앉아 들숨과 날숨을 내쉬듯 희미하게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한다. 임선이는 이 작품을 통해 삶이라는 이 시간의 무게에 내재한 ‘찬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2023년 설치작인 ‘몸을 잃은 새-다다른 곳#3’. 다양한 깃털을 엮어 크고 작은 구를 만들어 달았다. 또, 바닥은 이끼와 흙으로 마무리했다. 삶의 진짜 본질은 무지향적으로 떠도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2023년 설치작인 ‘몸을 잃은 새-다다른 곳#3’. 다양한 깃털을 엮어 크고 작은 구를 만들어 달았다. 또, 바닥은 이끼와 흙으로 마무리했다. 삶의 진짜 본질은 무지향적으로 떠도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작품이다.

 

2021년 연작 ‘바람의 무게-#여행자의 시간’에서 임선이 작가는 60여 년의 세월을 살아온 한 여성, 곧 어머니의 삶을 ‘여행자의 시간’으로 바라본다. 그는 어머니가 평생 사용했던 가방, 낡은 옷가지, 성모상 같은 물건들을 사진으로 촬영하고, 이 물건들을 단순한 도구적 사물이 아닌 시간과 기억의 조각으로 재현한다. 여기서 작가의 핵심 미학, 곧 부재의 미학이 뚜렷이 감지된다. 사진 속 텅 빈 공간은 결코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다. 오히려 무엇인가가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현존의 지표가 된다. 부재만큼 강렬한 현존의 증거가 어디 있을까? 사진 화면 속 낡은 옷들은 이제 곁에 없는 어머니의 몸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지층에 흔적과 기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언한다.

2025년 작 ‘드리워진 표피와 비워진 신체의 기억’. 3D 프린트, 철 페인트 등을 사용했다. 묵묵히 삶을 살아온 한 인간에 내재한 시간의 층위와 그 삶의 숭고함을 드러냈다.
2025년 작 ‘드리워진 표피와 비워진 신체의 기억’. 3D 프린트, 철 페인트 등을 사용했다. 묵묵히 삶을 살아온 한 인간에 내재한 시간의 층위와 그 삶의 숭고함을 드러냈다.

 

시간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무게를 다루는 임선이의 시각적 전복은 설치 작품 ‘몸을 잃은 새-다다른 곳’(2021)에서 극대화된다. 전시장 공간에는 다채로운 깃털로 촘촘히 뒤덮인 구형의 새가 떠다닌다. 몸을 잃어버린 이 새는 어딘가를 향해 날아오르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공간을 떠돌며 시간의 조각들과 기억의 파편들을 가만히 더듬어갈 뿐이다. 여기에는 성과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조형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 작품은 삶의 진짜 본질은 어쩌면 무지향적인 떠돎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존재론적인 물음을 던진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깊은 물음은 ‘드리워진 표피와 비워진 신체의 기억’(2025)에서 시각의 전복을 통해 가장 내밀한 풍경인 인간의 몸으로 이어진다. 좌대에 걸터앉은 노인의 늙은 몸은 두 가지 형상으로 제시된다.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표정도 보여주지 않는 노인, 그리고 마른 나무뿌리가 머리를 대신하고 있는 노인이다. 늙어가는 육체는 허망함이나 덧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묵묵히 삶을 살아온 한 인간에 내재한 시간의 층위를 증명하며, 그 자체가 삶의 숭고함을 드러낸다.

임선이의 작품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시간과 기억 그리고 몸으로 체험되는 불완전함에 대한 예술적 긍정이다. 작가는 자신의 노트에서 ‘불안의 평화’라는 역설적인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그의 예술적 궤적을 오롯이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삶의 풍경 앞에서 흔들리는 불안한 존재들이다. “오직 불안 속에 있던 사람만이 평안을 얻는다”는 키르케고르의 말처럼, 임선이는 불안을 억지로 지워내거나 배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불안을 긍정하는 시각적 전복을 통해 우리네 삶의 풍경을 아름답게 표상해 낸다.

임성훈 미학자·미술비평가

■ 임선이 작가는?

1971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2001년 중앙대 예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4년 동 대학원을 마쳤다. 다수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서 입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 충북대 조형예술학과에 출강 중이다. 2003년 첫 개인전 이후 총 15회의 개인전을 열고 주요 기획전과 단체전에 참여해 온 그는 2017년 제1회 JCC 프론티어 미술대상 우수상에 선정되었고, 2021년 제20회 우민미술상, 2022년 제6회 고암미술상을 연이어 수상하면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임 작가는 조각과 설치, 사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고유한 조형 미학을 선보여 왔다.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시각의 전복’이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반전이나 기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재라고 굳게 믿었던 풍경을 해체하고, 그 자리에 시간과 기억 그리고 몸의 현존성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작가는 모순과 불완전함, 고립과 부재 같은 삶의 불안한 요소들을 마주하며, 오히려 그것이 갖는 긍정의 의미를 조형적으로 묵묵히 재현한다. 끊임없는 시각의 전복을 통해 부조리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안의 평화’라는 역설을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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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unhwa.com/article/1158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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