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율 작가의 설치 작업 프로젝트 ‘고고학적 풍경-불의 만다라’ 중 ‘소성된 갯벌’. 서해안 갯벌에서 마주할 수 있는 해양생물의 집짓기 광경을 연상시킨다. 뜨거운 불 속에서 굳어진 테라코타는 생명의 기록이자 순환의 흔적이다.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12) 자연·문명 순환 ‘고고학적 성찰’… 차기율 작가 <끝>
통의동서 시작 발굴프로젝트
섬세한 붓질로 지층 벗겨내
공간·유물이 품은 기억 좇아
생가 터·야외공간·폐교 등
장소 옮겨가며 상상력 확장
갯벌 흙 구운 ‘불의 만다라’
생·사 순환 표현, 연금술적
차기율 작가는 자연과 문명의 순환을 주제로 자연물과 고고학적 유물 설치 작업을 주로 해왔다. 작가의 작업은 회화와 오브제를 다뤘던 1980년대, 자연물을 활용한 종교적·환경적 주제를 다뤘던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 들어 나무나 돌과 같은 자연물을 설치하거나 오지로의 여행을 통해서 대지미술과 수행적인 신체미술로 확장된다. 그는 특정 매체에 치중하지 않는 총체적인 작업을 통해 어머니의 땅이 가지는 원시성과 생명의 시원으로서 땅을 딛고 살아온 온갖 생명의 역사를 추적한다. 땅은 이 모든 생명현상의 원인이자 기록이다. 작가는 땅에서 난 것들을 취해서 작품을 만들고 땅 위를 이동하는 자기 몸으로 땅의 소리를 듣는다.
작가의 작업이 고고학적 발굴 프로젝트로 연결된 것은 2007년 통의동에서 있었던 ‘도시시굴-삶의 고고학’부터다. 이 작업을 시작으로 작가의 고향집 터를 발굴하는 ‘분향리 발굴’(2009), 대학 시절 학교 다니며 경험했던 개항기의 근대문화 흔적이 남아 있는 인천의 ‘배다리 발굴’(2009), 간척사업으로 인해서 바다가 육지가 되어 버린 섬에서 진행된 ‘형도’(2010), 스페이스 듬이 있는 주안동 1342-36번지의 주택 바닥을 발굴한 ‘주안동’(2014)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강원트리엔날레에 초대돼 시행한 홍천군의 ‘와동분교’(2021) 프로젝트가 최근 작업이다.
차 작가의 발굴 프로젝트는 섬세한 붓질로 지층을 하나씩 벗겨나간다는 측면에서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을 닮았다. 지층을 파 내려갈 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기준선을 배치하고 이 안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일지를 기록한다. 땅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만, 고고학은 생명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죽음의 역사를 추적한다. 통의동 한옥의 바닥을 파내고 시굴하는 현장에는 오래전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작가는 역사 지식을 동원하여 그곳이 창의궁 터였다는 사실이나 동양척식회사가 존재했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고고학자였다면 이 역사적 지식의 흔적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공간에 드러난 구들장과 한옥의 서까래 구조를 타고 흐르는 공간의 기운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 공간이 품고 있는 존재와 비존재가 어떻게 뒤엉켜 리듬을 타고 흐르는지 관망한다. 그는 작가 노트에 “뒤엉킨 선들의 유영은 드로잉의 선과 겹치기도 하고 확장되기도 하며, 자라고 소멸하는 유기적 현상을 끌어낸다. 바닥 면과 벽, 천장에 이르기까지의 공간은 치밀함과 느슨함, 채움과 비움에 의해 일정한 리듬을 갖는다”고 썼다.
포도나무, 자연석, 물, 철 등을 사용한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
발굴을 통해 획득한 유물이 목표라기보다는 발굴 과정에서 발가벗겨진 공간의 또 다른 모습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이후에 차 작가가 ‘고고학적 풍경’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는 이유를 살펴보면, 작가에게 있어서 고고학적 행위는 하나의 ‘발굴된 풍경’이거나 ‘과정형 퍼포먼스’에 가깝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것은 생과 사의 순환을 통해서 완성된 구원에 도달하는 세계를 구현하는 예술을 갈망해 온 작가의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작가는 이런 습관을 어린 시절 마당 한 귀퉁이를 파고 놀았던 기억에서 찾아냈다.
장소 특정적 의사(疑似) 고고학적 발굴 프로젝트는 학문적 연구 활동으로서 리서치 프로젝트 유형을 따르고 있다. 차 작가에게 있어서 고고학은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을 추적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그가 사용하는 발굴 프로젝트 안에서 고고학은 정교한 역사적 지식의 구축과 과학적 측정의 산물이라기보다는 발굴을 통해 드러나는 사물들의 외관을 미학적으로 분석하고 이 사물들이 불러오는 기억을 해석하는 정신분석학적 방식을 따른다.
차 작가의 발굴 작업은 하나의 공간 설치 작업이자 퍼포먼스 공간처럼 발전해갔다. 그리고 발굴된 사물들은 정교한 드로잉과 함께 진열장에 배치된다. 작업하는 공간도 다양해졌다. 작가의 생가터, 야외공간, 폐교, 가릴 것 없이 인간이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곳은 발굴할 수 있는 장소이며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안고 있는 모태가 된다. 미술사가 김미경이 차 작가의 작업에서 땅과 흙은 ‘정신의 자궁’이라고 표현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차 작가에게 땅과 흙은 ‘세계의 기억’이자 ‘모든 자연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장소를 옮겨가며 상상력을 확장해 나갔다.
발굴 과정에서 생과 사의 순환을 시도했던 ‘통의동 도시시굴’은 ‘고고학적 발굴-형도’ 프로젝트(2015)에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만났다. 형도는 시화방조제 공사를 통해서 섬이 육지가 된 곳이다. 이 주변에는 물속에 있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어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 보호지역으로 지정된 화성지질 공원이 있다. 차 작가의 발굴 프로젝트가 인간 문명이 축적된 구도심의 주거 공간이 아니라, 수만 년 전 생태기록이 남아 있는 지질학적 상상력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발굴 프로젝트는 굴곡진 땅의 표면이 아니라, 갯벌이 굳어서 형성된 표면에 균열을 내는 해양생물 그리고 물기가 빠지면서 표면 위로 스며 나오는 소금 결정의 하얀 분말의 물질적 상상력의 뿌리로 내려가야 했다. 토양의 표면에는 여기저기 해양생물들이 낸 구멍이 송송 뚫려 있고 작가가 발굴 작업을 통해서 땅속에 숨어 있는 사물들을 찾아내는 동안, 이 생물들은 집을 지었다. 이 공간의 상상력에서 소멸과 생성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도시시굴-삶의 고고학’ 전시 전경.
차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갯벌 흙을 구워 소성시키는 ‘고고학적 풍경- 불의 만다라’(2018)를 시도한다. 인천 만석동에 있는 우리미술관의 설치 작업을 통해서 소개된 이 프로젝트는 서해안 갯벌에서 마주할 수 있는 해양생물의 집짓기 광경을 연상시킨다. 뜨거운 불가마 속에서 굳어진 테라코타는 생명 활동의 기록이며 동시에 생과 사가 순환하는 ‘만다라(Mandala)’의 흔적이다. 만다라는 본래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원’과 ‘중심’을 의미하는데, 어원상으로는 본질을 의미하는 ‘Mandal’과 소유를 의미하는 ‘La’로 이루어진 단어다. 결국 ‘만다라’는 중심과 본질을 얻어 마음에 참됨을 얻는 수행에 많이 사용된다. 여기서 흙은 발굴이 아니라 소성의 대상이 되고 차 작가가 과거에 돌과 나무를 ‘발견된 오브제’로 사용했던 것처럼, 갯벌은 ‘발견된 오브제’로 불 속에서 소성된다. 물컹거리는 갯벌이 테라코타로 변형되는 과정은 연금술적이다. 검은 갯벌은 가마 속에서 붉은 황토 테라코타로 탈바꿈한다. 이 흙덩어리 안에는 해양생물들이 갯벌을 이용해서 만든 다채로운 조형 놀이(?)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여기서 작가는 이 흙을 변형한 마지막 지구 생명체에 불과하다.
작가는 질문한다. “물질에 대한 우월성을 주장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거의 물질과 같은 기반 위에 세움으로써 미술은 인류에게 좀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었을까? 계(Kingdom)-문(Phylum)-강(Class)-목(Order)-과(Family)-속(Genus)-종(Species), 우리는 어디에 닻을 내리려 하는 것일까? 강가에 앉아 돌을 보는 나는 인간이 진정 가야 하는 오디세이의 종착을 상상한다.” 그의 물질적 사유는 생명체이면서 물질인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한다. 유사 이래로 세계는 인간 상상력의 원천이며 깨달음의 근원이었다. 작가는 “물이 흘러 순리에 이르는 것처럼, 역사의 순간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 역시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흘러서 지금에 이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고의 선(善)은 물과 같다고.
백기영 전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
■ 차기율 작가는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다. 인천대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현재 인천대 조형예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로 회화, 드로잉, 오브제와 설치 작업을 통해 자연의 순환과 유기적인 생성 및 소멸에 대해 작업했다. 199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부유하는 영혼’ ‘땅의 기억’ ‘사유의 방’ ‘순환의 여행’이라는 주제로 활동을 이어오다가, ‘순환의 여행-방주와 강목 사이’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2007년 통의동 한옥발굴 프로젝트 이후 ‘도시시굴-삶의 고고학’ ‘고고학적 풍경-불의 만다라’(2018)를 발전시켰다.
‘부유하는 영혼전’(단성갤러리, 1992)을 시작으로 서울, 인천, 미국 로스앤젤레스·버몬트 등에서 개인전을 선보였고 ‘노래하는 땅’(부산), ‘황해어보’(인천·2023), 인천평화미술프로젝트(2012∼2013)와 같은 주요 기획전이나 부산비엔날레(2010), 강원트리엔날레(2021),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2022) 등에 참여했다. 2002년 버몬트 스튜디오를 비롯해 국립창동미술스튜디오(2003), 하제마을창작스튜디오(2004), 쿤스트독국제창작스튜디오(2006)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기획한 노마딕레지던시 프로그램(몽골, 제주, 호주)에도 참가했다. 박수근미술관, 전등사, 전곡선사박물관, OCI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컬렉션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2000년 중앙미술대전 우수상과 2022년 제7회 박수근미술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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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1202010324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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