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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빈 공간 품은 무수한 사진들… 그곳에 머물다 간 ‘삶의 情景’ (고명근 작가)
  • 게시일 : 20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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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빌딩 연작 중 뉴욕을 소재로 한 ‘블루 빌딩(Blue building)’, 110×52×37㎝, 2024.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10) 사진과 입체작업 융합… 고명근 작가

투명 다면체에 이미지 중첩
평면적 시공간 입체적 재구성

30여년간 세계 각지로 출사
수집한 사진 선별 작품 구상

플라스틱이 만드는 빈 공간
보는 사람의 상상으로 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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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지 박스 안이 텅 비어 있다는 느낌을 통해 세상이 이미지에 불과한 ‘그림자 세상(shadow world)’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의도하는 ‘본다는 것’은 ‘비어 있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 공간은 시각적으로 비어 있는 곳이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 비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보는 사람의 상상으로 채워지는 빈 곳이기도 하다.”(고명근)

고명근 작가의 투명한 사진조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는 이미지의 정경이 인상적이다. 얇은 플라스틱판(플렉시 글라스)으로 만든 투명한 다면체에 빛이 더해지면 무수한 이미지의 지층이 생성되면서 마치 영화의 장면들을 보는 듯 전혀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미묘한 결을 형성하며 중첩되는 이미지에 관객들은 저마다 작가의 의도를 찾으려는 듯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작가의 전략이 가시적인 이미지의 효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구심과 함께 화려한 장면들 너머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고명근은 사진과 입체작업을 융합해 만든 ‘사진조각’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한국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1980년대 말에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사진을 접하게 되었고 자신의 전공인 조각에 사진을 접목해 사진조각이라는 영역을 개척해왔다. 조각 전공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입체와 평면을 결합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생각에서 이 개념이 출발했다고 한다. 조각 장르가 지닌 역사성과 사진 특유의 시대성의 만남에서 독특함을 발견하고 조각과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제3의 영역을 찾아낸 것이다. 초기에는 나무나 금속 구조물의 표면에 종이로 인화된 사진을 붙여 그 위에 레진(resin)을 바르는 등 ‘불투명하고 무거운 조각’을 만들었고 이것이 그의 사진조각의 출발점이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이와는 상반된 ‘비어 있는 투명한 공간’을 중심에 둔 작업을 통해 이미지와 공간의 관계를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photo‘충칭(Chongqing18-5)’, 90×23×5㎝, 2022.



작가가 세계 곳곳을 다니며 촬영한 사진은 투명한 OHP 필름에 출력해서 여러 겹의 플렉시 글라스 판 사이에 압착하는 과정을 거쳐 입체로 구현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매체를 접목하는 것 못지않게 이들 이질적인 재료들을 조화롭게 결합해서 다면체의 구조로 완성하는 것 또한 작가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수차례에 걸친 시행착오 끝에 뜨겁게 달군 인두로 플라스틱 패널의 모서리를 녹여서 견고하게 접합하는 방법을 고안하였고 마침내 빈 공간을 품은 현재의 사진조각이 탄생했다.

일반적으로 사진이라 하면 복제개념을 떠올리지만 작가는 이보다는 우리가 사는 현실 공간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진을 “공간을 압축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독특한 발상은 그를 국내외의 유수한 장소와 공간으로 이끌었고 현재도 ‘이미지 포획자’를 자처하며 일상의 공간부터 역사적인 곳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마음 경로를 따라 성실히 이미지를 수집하고 있다. 사진조각은 뉴욕 유학 시절에 인상적인 건물들을 촬영한 ‘빌딩(Building)’ 시리즈를 시작으로 2000년대부터 자연 이미지를 도입해 곡면으로 표현한 ‘자연(Nature)’ 시리즈로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한 ‘몸(Body)’ 시리즈는 세계 여러 미술관에서 만난 조각상을 테마로 한 것인데 조각가로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최근에는 자연 이미지를 배경으로 입체와 공간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른 관점에서 모색하고 있다. 다면체로 이루어진 구조를 해체하면서 깊이를 축소해 평면적으로 압축하고 특정한 주제를 다시 점으로 재구성한 ‘삼부작(Trilogy)’ 시리즈를 통해 공간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면서 조각적인 상상력과 사진이 융합된 남다른 접근법을 보여주고 있다.
 

photo‘팡테옹(Pantheon 21-1)’, 100×60×32㎝, 2022.



고명근 사진조각에서 핵심적인 과정은 다양한 곳의 사진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난 30여 년 동안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을 시작으로 베이징과 톈진, 충칭을 비롯해 홍콩, 베트남, 도쿄, 타이베이 등 아시아 지역과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곳곳으로 여행을 떠나 약 30만 장의 사진을 수집하였다. 작가에 따르면, 작품의 주제나 목적을 미리 정해놓고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채집된 이미지들로 아카이브(archive)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기 때문에 이미지를 최대한 촬영해 확보하고 다양한 이미지 가운데 선별해서 작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오랜 출사(出寫) 여행이 말해주듯 작가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지양하고 실재성이 있는 공간을 사진에 담아왔다. 게다가 사진을 촬영할 당시 분위기가 자아내는 색감까지도 최대한 실현하도록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사진의 압축된 시공간을 해체하고 입체적으로 재구성”하여 보는 이들이 최대한 다채로운 공간을 경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작가는 사진에 진지하게 접근하되 사진 본령의 정의에서는 비교적 자유롭다고 밝힌 바 있는데, 이 때문인지 사진을 끌어들여 실재성을 부여받은 공간은 마치 차경(借景)한 것처럼 더욱 확장성을 지니게 되고 다이내믹한 삶의 정경을 연출해내는 듯하다.

그는 사진조각에 이미지를 중첩해 레이어를 조성한 것에 대해 한정된 공간 안에서 관객들이 이미지에 가려진 공간감을 최대한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강조한다. 작가의 말처럼 ‘세상이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오히려 ‘비어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실재성의 이미지를 매개로 투명한 공간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그는 존재의 공성(空性)을 자신의 투명한 사진조각을 빌려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시공(時空)이라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또한 이 안에서 변화하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예리한 자들은 알아차릴 것이다. 작가의 투명한 조각이 자성이 없는(無自性) 빈 정경(情景)일 뿐이라는 것을.

한편 사진조각의 대부분이 높이가 1m 전후의 규모를 보이고 있지만 공간에 담아낸 이야기는 실로 방대하다. 시공간을 초월한 역사적인 유물과 유적지부터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순간들 그리고 푸른 색감으로 상징된 미지의 자연현상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이야기들은 지금껏 작가의 기억 그리고 일상과 나란히 결을 함께한 궤적과도 같아 보인다. 이미지로 둘러싸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기억을 소환하고 자신의 관념과 이미지 사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것이다. ‘투명한 빈 공간’은 관객들의 시선이 투영되어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고 작가의 오랜 기억들이 머무는 순간들을 공유하는 교차로가 될 것이다.

김수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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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명근 작가는

1964년생으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와 미국 프랫 인스티튜트 순수미술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조각적인 사유와 사진을 융합한 ‘사진조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독창성을 드러냈다. 조각 장르의 역사성과 사진의 시대성에 주목해온 작가는 공간과 인물의 관계를 ‘투명한 사진조각’에 구현해 ‘비어 있음’에 대한 남다른 미학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실재성과 존재의 공성(空性)에 대한 자신의 세계관을 작업에 투영하기 위해 현재까지 국내를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사진 이미지는 약 30만 장에 달한다.

국민대 예술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2008년 개인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교단을 떠났다. 조각계와 사진계를 넘나드는 ‘크로스오버 아티스트’로도 불리며 아시아와 북미, 유럽의 주요 전시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쌓았고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1991년 뉴욕을 시작으로 국내외 20회 이상 개인전을 개최했고, 1994년 ‘젊은 모색전’(국립현대미술관), 1998년 ‘Alienation and Assimilation(소외와 동화)’(시카고 현대사진미술관), 2009년 ‘Moon Generation(달 세대)’(런던 사치갤러리), 2010년 ‘한국 현대사진의 단면’(국립대만미술관), 2015년 ‘환영과 환상’(국립현대미술관) 등의 전시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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