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모 작가의 2018년 작품 ‘에고(ego)’. 스테인리스 와이어를 사용해 물질과 비물질 경계에서 부유하는 자아를 표현했다. 196×88×70㎝.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9) 자아 실체에 더 가까이… 박승모 작가
예술작품이라는 ‘틀’을 거부
자아 최소화, 존재 구현 꿈꿔
현실-비현실 경계가 모호한
‘근원적 무상성’으로 나아가
고대유적 실사 출력해 작업
눈에 안 보이는 현실 다가서
작업장에는 철사를 세밀하게 감아 만든 입체물들이 놓여 있다. 또 철사와 철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벽 또는 허공에 걸려 있다. 또 작업장 한편에는 파헤쳐지고 허물어진 벽이 서 있다.
박승모는 철사와 철망을 겹쳐 풍경, 인물 등을 회화적 조각으로 표현하는데, 사실상 이러한 작업은 예술작품이라는 고정된 틀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기존의 조형어법과는 다른 방식이다. 현상과 본질, 실재와 허구를 뒤섞는 이러한 작업은 내면적 통찰에서 나오는 것으로 삶과 예술의 경계 사이의 실존적 공간을 생성하는 것이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철사 작업은 실물을 본뜬 합성수지에 와이어를 감아 대상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랜드 피아노’ ‘사모트라케의 날개 달린 승리(Winged Victory of Samothrace)’ 등의 작업은, 기존의 사물 이미지를 가리고 철사 작업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대상의 형상은 그대로 생성하지만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의 물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즉 그렇게 지우고 생성되는 경계의 활동이 이러한 작업들의 핵심이다. 현실과 가상,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하는 작업은 ‘환(幻)’이라는 작업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근원적 무상성으로까지 나아간다.
설치 작품 ‘부재(Absence)’, 2014.
대상을 가리고 새롭게 생성하는 ‘환’의 방식은 대상과 자신과의 관계를 점검한다. 또 대상과 대상을 감싸고 있는 주위의 형상들을 자신의 내적 성찰의 영역으로 수렴시키는데, 여기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지평이 바로 박승모의 작업인 것이다. 이러한 박승모만의 독특한 작업은 미술사의 전통보다는 개인적인 혹독한 탐구의 결과인데, 이것은 작가가 대학 졸업 후 인도로 떠난 여정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박승모는 대학을 졸업한 후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외국으로의 유학 대신 인도로의 여행을 택한다. 여기에 대해 작가는 유학을 가봤자 자신의 작업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그 길을 택했다고 한다.
5년여에 걸친 인도에서의 체류는 박승모의 삶과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티베트 불교와의 만남이다. 박승모는 여행 중 인도에 망명 중인 티베트 불교의 사원을 방문하였는데, 운 좋게도 스님들이 모래로 만다라를 제작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스님들은 큰 탁자 위에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고 있었는데, 마치 치열한 구도의 현장처럼 고되고 지루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들어진 만다라를 고승이 최종 점검을 한 후 그 형상을 휘휘 저어 없애버리는 것이다. 놀라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데 승려들이 다시 모여 불평 한마디 없이 또다시 반복적인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보던 박승모는 자신의 삶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 빠지게 된다. 마치 잃어버린 그림자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찾아도 잃어버리게 되는 그림자를 영원히 찾을 수 없다는 고뇌가 그것이다. 기존의 예술작업은 인간의 유한성을 물질적 상상력으로 포착해 상징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지만, 인간 존재의 본원적인 무상성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알루미늄 와이어 등을 사용한 ‘그랜드 피아노(Grand piano)’, 2004.
기존 조각의 흙, 돌, 철 등은 ‘물성’을 보여주는 근원적인 재료이지만 형체와 질량이라는 물질적 제약 때문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박승모는 철사와 철망을 작업 재료로, 즉 최소한의 물질로 근원적 무상성으로의 접근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이 ‘자아’를 최소화하는 작업이다.
물질과 무(無)의 구분이 공허함을 설파한 불교의 해석처럼 박승모의 ‘에고(ego)’, 즉 자아는 물질과 비물질 어디에 속하지 않으면서 그 경계에서 부유하는 실체이다. 그렇다고 자아가 ‘공(空)’의 ‘발현태’로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자아를 최소화한다는 것은, 작품 제작에 있어 의도적 인위성을 최소한으로 제거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작품을 열린 공간으로 진입시켜 자유로운 존재의 구현을 꿈꾸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과 본질의 경계에서 자아가 작용할 때 가능한 일이다. 허허로움과 견고함이라는 양가성의 저변에 흐르는 강물에 자아가 발을 디딜 때 존재의 근원이 스스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이라는 이러한 작업은 최근에 나타난 ‘부재(Absence·2014)’나 ‘마야(Maya)’ 같은 설치작업을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리고 2022년의 개인전 ‘모든 것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그의 자아는 심화된다. 작가가 맨해튼의 거리를 걷다가, 카페의 유리창에 건물 내부와 외부가 모두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고 이를 다시 다중의 철망으로 표현한 9점의 윈도 시리즈는, 예술작품의 근원적 의미와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를 하나의 지평에서 융합시킨다.
이런 식의 설치 작업은 작품 뒷면에서 투사되는 조명 때문에 이미지가 사라지거나 관객이 작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환(幻)’의 극대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자아가 가진 경계에 대한 상황인식에서 나온다. 대상을 선험적 의식으로 환원시켜 대상 이해의 인위성을 제거하고 대상 이해를 자유롭게 하는 이러한 ‘환’의 방식은, 인간의 유한성을 응시하고 그것을 새로운 조형언어로 조망하려는 작가의 의지이다.
‘현실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reality)’, 2018.
‘현실의 본질에 대한 통찰력(Insight into the true nature of reality·2018)’은 유럽의 고대 유적의 벽을 실사로 출력하여 재구성한 작업인데 기존의 철사와 철망 작업과는 다른 무게감을 준다. 그리고 이 작업은 기존 작업들의 다양한 전개들이 하나로 응축되는 느낌이다.
허물어진 폐허의 유적은 현실과 가상, 동경과 한탄, 평안과 불안을 동시에 상징한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폐허의 벽은 수많은 현실이 스쳐 지나간 자리이고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예견하는 상징이다. 이러한 벽을 통해 작가는 경계의 삶이라는 불안정한 세계를 구체화시키고 관념의 회기라는 추상성을 극복하려 한다. 결국 박승모의 작업은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 현실을 주목하여 현실의 진정한 모습, 즉 존재의 근원에 다가서고자 하는 것이다. 거울 같은 현상의 세계는 순간의 비침이기 때문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깊은 명상과 성찰이 필요하다. 경계를 통해 현실을 조망하고 존재의 근원을 묻는 박승모의 작업은 이제 시간의 흐름 위에 올라서려 한다. 이 시간의 흐름에서만 현실의 허상과 존재자의 유한을 넘어서는 진정한 예술 공간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진엽 미술평론가
■ 박승모 작가는
1969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나 부산 동아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0년대 중반 인도로 향해 5년여의 시간을 명상과 수행으로 보냈다. 이곳에서의 체험은 박승모 작가의 삶과 예술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 실제적 체험은 예술의 절대적 가치와 미(美)의 완성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인가를 목격한 순간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자아(ego)의 실체를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박 작가는 2005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중국, 대만, 미국, 독일을 오가며 전시를 했고, 작업실을 뉴욕과 베를린, 서울 등 세계 각지에 두고 활동했다. 2009년 영국 런던사치갤러리, 2010년 경기도미술관(안산), 2011년 플라토갤러리(서울), 아트디자인박물관(뉴욕),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 2014년 MOCA대만뮤지엄(타이베이), 데노스뮤지엄(미시간), 2015년 켄들 칼리지 오브 아트 앤드 디자인, 2016년 버그도프 굿맨(뉴욕), 2018년 사스피 퍼빌리언(프랑크푸르트), 2019년 롯데뮤지엄(서울), 2021년 탕 컨템포러리 아트(홍콩), 2022년 스페이스 호화(서울)에서 개인전 및 그룹전에 참여했다. 미국 오리건주 나이키 본사와 인천 파라다이스 시티 호텔 등에 작품을 설치했다.
[기사보기]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102101032112000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