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K-조각칼럼
상세
⑧ 딱딱한 고체서 부드러운 거품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새기다 (신미경 작가)
  • 게시일 : 2024-10-07
  • 조회수 : 34

photo지난 6월부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미경 초대전의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8) 후각·시각·촉각의 조화… ‘비누 조각가’ 신미경

헛됨 상징 ‘바니타스’ 변주
흘러가는 시간 경계 허물어

미술관 세면대엔 아기천사
취약한 환경요소까지 극복

비누 녹여 굳힌 평면추상화
오묘한 색 조합으로 신비감

 

photo

“이거 정말 만져도 될까요?” “아니겠지, 전시된 작품이잖아!” “여기 봐요, ‘세면대 옆에 놓여 있는 천사 조각으로 손을 씻어 보세요. 이 작품은 마음껏 만져봐도 괜찮아요’라고 쓰여있는데요!” “그럼 귀여운 천사 얼굴을 문질러서 손 좀 씻어 볼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중년 남성 두 명이 이색적인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세면대 양쪽에 놓인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 2024’ 작품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아기천사 형상의 조각은 비누로 만든 것이다. 신 작가는 동서양 문명의 가치를 ‘비누 조각으로 번역해 온 현대미술가’로 유명하다. 그의 비누 작업은 1996년부터 시작해 30년 가까이 이어왔다. 하필이면 왜 비누일까? 어느 날, 우연히 학교 화장실에서 분홍색 비누를 봤고, 마치 그것이 핑크 대리석처럼 느껴졌던 게 계기였다고 한다.
 

photo‘화장실 프로젝트 2024’ 설치 작품. 화장실 세면대에 놓인 ‘아기 천사 조각상’ 비누는 손을 씻을 때 사용해도 된다.



비누는 아주 중의적이고 흥미로운 매력의 소재이다. 대개 딱딱한 고체 형태지만, 이면엔 감미롭고 부드러운 느낌도 지녔다. 거품도 빼놓을 수 없다. 거품은 덧없음의 상징이다. 딱딱한 덩어리가 금방 거품으로 사라지는 과정은 인생의 덧없음이나 죽음에 대한 은유적인 메시지를 담은 바니타스(Vanitas) 그림도 떠오르게 한다. 라틴어인 바니타스는 ‘헛됨’을 뜻한다. 구약성서 전도서 12장 8절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all is vanity)’의 글귀 첫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바니타스 정물화에 비누도 자주 등장한다.

신 작가의 비누 작품은 ‘바니타스 조각의 새로운 전형’으로 볼 수도 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역사적 유물의 재해석이나, 폐허의 현장을 재현한 장면이 그렇다. 신 작가는 “우리가 폐허를 보러 갔을 때, 남아 있는 것을 보면서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상상하며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 ‘가시화된 시간성’을 작품으로 담아낸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액체처럼 흐르는 시간을 고체화시킨 것이 신미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유물인 셈이다. 유물은 처음부터 만들어진 게 아니다. 여러 문명의 시간과 그 경로의 결들이 축적된 결과이다. 비누라는 한 소재로 인류의 역사와 삶에 대한 본질적 화두를 단번에 꾀어낸 명징한 작품의 탄생이다.

오늘 완성된 작품이지만, 마치 시간의 경계를 무색하게 만드는 초월적 미감을 발산한다. 신미경을 세월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연출하는 ‘시간의 연금술사’로 비유하는 이유이다. ‘투명하고 향기 나는 천사의 날개 빛깔처럼’, ‘시간/물질: 생동하는 뮤지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등 전시 제목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사라지는 것이나, 완벽하게 존재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부분의 ‘접점이 생기는 간극’을 보여주고 싶다”라는 작가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그래서 전시나 작품의 제목을 통해 작가의 생각이나 메시지를 수월하게 눈치챌 수 있기도 하다.

가령 2018년 10월 영국 런던 바라캇갤러리에서의 전시 제목인 ‘날씨(Weather)’도 아주 돋보인 사례이다. 바라캇 컬렉션의 고대 유물들과 함께 비누 도자기 신작을 선보인 전시였는데, 제목이 왜 하필이면 ‘날씨’였을까? 일상에서 사물이 낡고 닳아가는 과정인 ‘낡기(weathering)’, 그 위를 흐르는 초월적인 시간과 자연의 변화를 나타내는 ‘날씨(weather)’의 중의적인 의미를 한 번에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이 전시 중 흙이 가마 안에서 돌처럼 단단해지는 과정 중 폭발 현상으로 생성된 파편을 다시 도자기로 구워낸 ‘거석 시리즈(Megalith Series)’ 작품도 주목받았다. 마치 우주 탄생의 비밀을 품은 별처럼, 폭발의 순간을 정지시켜 다시 정교하게 기록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결을 시각적으로 포착한 또 하나의 방안이었다.
 

photo회화 시리즈 005.



비누는 이집트 벽화나 구약성서에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아주 깊다. 고대 로마인들이 사포(Sapo)라는 언덕의 재단에서 양(羊)을 태워 신에게 바친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제사를 마친 후 청소부가 타고 남은 재를 집으로 가져와 물통에 넣고 빨래했더니 때가 잘 빠지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됐다. 바로 그 재 안에 양이 타면서 녹은 기름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언덕 이름을 따서 부른 ‘사포―오늘날 소프(soap)’의 어원이 생긴 것이다. 한자의 어원도 ‘더러움을 날려 보낸다’라는 뜻의 비루(飛陋)에서 유래됐다. 신미경이 비누를 예술가적 영감의 소재로 발견한 것도 아주 우연의 순간적 만남에서 비롯됐지만, 비누가 작가로서 필연의 숙명적 인연이었음을 깨닫는 데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비누의 발견과 탄생 과정처럼.

신 작가가 비누 재료를 얼마나 완벽하게 다루고, 창의적인 예술작품으로 승화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들이 있다. 우선 영국 유학 시절인 2006년 대학에서 벌인 ‘6개월간의 퍼포먼스’ 사례이다. 학교에 있던 ‘아프로디테 조각품을 복원한다’라는 소식을 듣고 신 작가도 그 조각 옆에서 비누로 함께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아주 흥미로운 아프로디테 복원의 빅 매치가 자연스럽게 성사된 셈이다. 6개월이 지나서 결과는 놀라웠다. 신미경의 완벽한 승리였다. 우연한 이벤트가 학교는 물론 런던 미술계의 유명인으로 만들었다. 비누로 만든 그리스 신화 속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라, 생각만 해도 너무나 안성맞춤 찰떡궁합이 아닌가!
 

photo천사상 비누조각.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다. 아프로디테 사건 이듬해인 2007년이다.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한국관에서 ‘달항아리’에 관한 특별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99년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한국의 ‘달항아리’를 부득이 옮겨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 비워진 유리 진열장에 바로 신미경의 ‘비누 달항아리’가 대신 전시됐다.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어떤 관람객도 그것이 백자가 아닌 비누로 만든 ‘페이크 달항아리’였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대상의 특성을 녹여낸 작품의 깊이는 신미경의 독보적인 경쟁력이다. 전문가의 눈마저 속일 완벽한 테크닉 구사와 비누가 지닌 후각, 촉감, 시각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탁월한 매력이 정말 일품이다.

조각이나 설치 이외에도 비누 재료를 활용한 평면 추상화 ‘라지 페인팅(Large painting)’ 시리즈도 선보인다. 페인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당연하게 ‘비누로 된 평면 조각’이다. 여러 색의 비누 수백 킬로그램을 녹인 다음 큰 틀에 한꺼번에 부어서 굳히는 방식이다. 여러 비누 색의 조합은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듯 신비롭고 오묘하다. 회화의 격정적인 붓 터치가 연출한 역동성 못지않다. 이렇듯 신 작가는 미술을 시작한 학창 시절부터 무엇이든 재현해 내는 것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입체적인 조형성과 정밀하고 세밀한 표면 처리는 아름다운 탄성을 자아낸다. 그녀의 타고난 기예가 비누라는 특별한 소재를 만나서 내면의 감성까지 발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미경의 예술적 감성은 세월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문화적 조형 어법으로 새롭게 번역한 시간의 공감각적 유물이다. 예술(품)이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쉽고 명쾌하며 독창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생성과 소멸, 슬픔과 환희, 불협과 조화, 과거와 현재…. 작품은 서로 다름의 새로운 상생을 위한 지혜를 보여준다. 신미경의 작품은 갤러리, 미술관, 광장 등 장소를 불문하고 너무나 환경적 요소에 취약한 비누 재료의 한계성을 극복해 냈다. 그녀의 무모한 실험과 도전은 여전히 매혹적인 현재 진행형이다.

김윤섭 미술평론가
 

photo



■ 신미경 작가는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 학사와 석사과정, 런던 슬레이드 스쿨 조소과와 영국 왕립예술학교 세라믹&유리공예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선정,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시리즈’ 초대작가, TV CHOSUN 주최 제2회 하인두예술상 수상 작가로 선정됐으며, 모나코왕세자재단 주최의 모나코 국제현대회화전에서 ‘모나코 왕국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큰 활동을 보이는 중진 작가이다.

2004년과 2007년에 영국 대영박물관 전시 초대작가로 선정되어 현대적 맥락으로 해석된 그리스-로마 조각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는 등 그동안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아르코미술관, 코리아나미술관, 우양미술관,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 런던 바라캇갤러리 등 국내외 미술관 및 주요 갤러리에서 35회 이상의 개인전과 베니스비엔날레 본 전시를 포함해 다수의 기획 단체전에 참여했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미국휴스턴미술관 등 많은 미술관과 공공기관,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현재는 영국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국제무대에서 활동 중이다.
 

photo

 

[기사보기]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100701032312000001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