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훈 작가의 ‘코뿔소의 가짜왕국(The Rhinoceros of the Fake Kingdom)’. 철, 세라믹, 항공기 부속품 등을 활용해 작업했다. 205(가로)×170(세로)×360(높이)㎝, 2015.
■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6) 물질과 오브제의 만남… ‘힘의 조각가’ 성동훈
철·시멘트 등 오브제 섞어
관습·규율 깬 예술적 실험
‘돈키호테’로 탈주 꿈꾸고
‘…가짜왕국’선 모순 풍자
키네틱 조각·노마딕 아트
움직임과 시간까지 아울러
◇패러디, 혼성을 통한 돈키호테의 풍자적 변주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모습을 쏙 빼닮는다는 말이 있다. 조각가 성동훈의 작업은 제도적 관습과 규율에 얽매이길 싫어하고, 새로운 예술적 실험을 찾아 유목하면서 그저 유유자적하기를 즐기는 그의 호탕한 풍모와 닮아있다. ‘돈키호테’ 연작이 대표적이다. 이 연작은 그가 20대 시절, 제1회 MBC한국구상조각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 ‘돈키호테 II Korea’(1990)를 통해서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작품은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소설 속 주인공인 돈키호테(Don Quixote)를 패러디(parody)한 것이다.
그렇듯이, 성동훈의 돈키호테 연작은 소설 속 주인공의 엉뚱한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도 그것 이상의 상상력 변주를 실험한다. 그의 작품 ‘무식한 소-돈키호테’(1996)에서 긴 창을 들고 있는 돈키호테는 기계 부속품과 철 오브제가 뒤섞인 채 등장하고, 그가 타고 있는 ‘늙은 말 로시난테’는 시멘트로 된 저돌적인 황소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시난테는 2009년 작품에서 꽃으로 둘러싸인 황소의 모습으로, 2014년 작품에선 뚱뚱한 암탉의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 1996년 작 ‘무식한 소-돈키호테(Cow of Illiteracy-Don Quixote)’.
돈키호테 연작이 선보이는 혼성과 변주의 상상력은 기대 이상이다. 그는 고꾸라지고 있는 말 위에 올라탄 위태위태한 돈키호테의 모습뿐만 아니라, 두 발을 들어 질주하는 황소 위에 기백 있는 꼿꼿한 자세로 올라탄 돈키호테의 모습을 선보이기도 한다. 건축, 산업 재료인 시멘트, 철근, 철 오브제를 조각의 질료로 삼아, 다른 동물로 변형한 로시난테나 엉뚱한 자세를 취한 돈키호테의 이미지는 소설 속 메시지만큼 풍자적이고 매력적이다. 세르반테스가 창출한 ‘망상에 빠진 돈키호테’가 전투 중 해적의 포로 생활로 고난에 처했던 자전적 경험을 풍자적으로 담아낸 자화상인 것처럼, 성동훈의 ‘돈키호테’ 역시 예술이 한낱 쓰레기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험난한 동시대를 예술가로 사는 자신의 자화상으로 출발한다.
성동훈의 돈키호테 연작에 나타난 패러디, 혼성, 변주의 조형 언어는 민중의 걸쭉한 농지거리처럼 본능적이고 직접적이지만, 또한 블랙 유머와 같은 비판적 해학의 미학 정신을 잊지 않는다. 즉 ‘패러디에 대한 또 다른 패러디’를 통해서 대중에게 익숙한 ‘옛것’을 희화화시키고 ‘현재의 시대’를 통렬히 풍자함으로써 대중에게 친근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의 돈키호테 연작은 자화상에서 비롯된 본능적 풍자를 통해서, 각박하고 비루한 현실을 강퍅한 심성으로 사는 오늘날의 현대인에게, 현실 밖을 꿈꾸게 만드는 ‘탈주의 내러티브’를 선물한다고 해설할 수 있겠다.
2010년 타이완에 설치한 ‘소리나무(Sound Tree)’.
◇물질과 오브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넘치는 상상력
성동훈의 작업에 나타난 혼성과 변주의 내용적 차원, 즉 전통·현대, 서양·동양, 미술·기술, 미술·비미술, 작품·관객의 관계 미학을 형성하는 차원은, 조각가 성동훈이 물질과 오브제에 부여하는 넘치는 상상력에서 기인한다. 성동훈의 또 다른 작품 ‘코뿔소의 가짜 왕국’(2015)은 코뿔소를 타고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인해 돈키호테의 변주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물질과 오브제의 만남을 주선하는 그의 상상력을 통해서, 혼성과 변주의 세계를 실감 나게 선보인다.
철, 세라믹, 항공기 부속품 등 각종 오브제와 물질이 혼성된 이 작품은 각 재료에 담은 작가의 상상력과 미학적 함의에 힘입어 살아 꿈틀거린다. 이 작품은 작품명처럼 생물·무생물, 과거·현재, 서구·비서구, 기술·미술, 현실·우화, 실재·허구의 개념이 역설적으로 맞물리는 ‘하나의 가짜 왕국’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곧 성동훈이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자화상이자, 그가 그리는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수시멘트와 철, LED 조명등을 사용한 ‘머릿속으로(Into Brain)’, 2009.
물질과 오브제를 마치 연금술적 상상력으로 만나게 하는 성동훈의 조형적 실험은 여러 작품에서 두루 드러난다. 용광로에서 쇠를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인 슬러지(sludge)로 제작한 작품 ‘마주신의 보디가드’(2014)는 넓은 좌대 위에 거대한 새를 타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담아 돈키호테의 변주를 암시한다. 버려진 슬러지를 작품의 재료로 끌어들인 조형적 실험과 그 자체로 발견된 형상을 변형하는 그의 상상력은 가히 감탄할 만하다. 기다란 창을 들고 땅에 직립한 사람을 만든 작품 ‘지금 여기 이렇게 산다’(2013), 철 부속과 슬러지를 섞어 만든 거대한 덩치의 황소 형상의 작품 ‘철로의 움직임’(2014), 철 오브제와 도자기로 혼성한 말의 두상을 형상화한 작품 ‘헤드(Head)’(2015)는 재료로서의 질료 그리고 ‘발견된 오브제’와 ‘만들어진 오브제’가 한데 뒤섞인 ‘연금술적 재료 실험학’의 결과라고 할 만하다.
인도에서 구매한 불상, 말, 소 등의 미니어처 조각을 캐스팅해서 하나의 커다란 황금 황소를 만든 작품 ‘명상’(2015)은 각기 다른 장소에 있던 오브제와 그것이 품은 분절된 이야기들이 하나의 작품 안으로 들어와 새로운 이야기로 편입되는 데페이즈망(depaysement) 전략을 흥미롭게 구현한다. 나팔이나 장난감 자동차와 같은 ‘발견된 오브제’와 오래된 나무 덩어리로 만든 소나 코끼리처럼 ‘만들어진 오브제’가 뒤섞인 작품 ‘시간의 여정’(2017)은 분할된 이전의 시공간을 다른 맥락 속으로 편입하는 상상력 가득한 초현실주의 풍경을 만들기도 한다. 특히 그릇이라는 쓰임새를 전제로 만들어진 ‘도자기’나 장식을 목적으로 한 ‘구슬(Beads)’과 같은 오브제를 순수 예술인 조각의 재료로 삼은 성동훈의 작품은 흥미롭다. 청색 안료가 선명한 청화백자로 된 중국 찻잔을 사슴의 몸 위에 두른 작품 ‘백색 왕국’(2015)이나 사슴의 온몸에 푸른빛 비즈를 입힌 작품 ‘블루(Blue)’(2015)는 마치 과거와 미래를 현재에 소환한 것만 같다. ‘블루’ 연작에 사용한 LED 조명 또한 볼륨과 매스에 충실했던 조각의 언어를 신비로운 분위기로 증폭하면서 상상력 가득한 시공간의 이동을 체험하게 만든다.
◇움직임, 바람, 소리, 시간을 먹고 사는 키네틱 조각과 노마딕 아트
성동훈의 작업은 전통적인 조각의 언어를 계승하면서도 움직임과 시간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확장한다. 그의 작품 ‘머릿속으로’(2009)는 사람이 들어갈 만큼 거대한 두상 조각이 유압장치를 통해 열리고 닫히기를 거듭한다. 두상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좌우로 열리면 그 내부에 설치된 호박 형태의 조각이 회전 운동을 선보인다. ‘점잖은 호박’(2008)이나 또 다른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은 존재한다. 움직이는 미술이라 불리는 키네틱 조각(kinetic sculpture)인 셈인데, 감춤과 드러냄을 반복하는 이러한 작품들 앞에서 관객은 호기심을 통한 몰입에 자연스럽게 잠입한다.
움직임은 기계 장치뿐 아니라 자연의 바람으로도 가능하다. 작품 ‘소리나무’(2010)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거대한 나무에 무수히 매달린 세라믹으로 된 작은 종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아름답고도 청아한 소리를 우리에게 전한다. 여러 재질과 형식으로 변형되어 세계 각지에 설치된 이 연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종을 흔들어 작품을 ‘움직이는 무엇’으로 가시화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구현하는 조각으로 변환, 확장해 나간다.
성동훈의 작업은 볼륨과 매스를 중시하는 전통적 형식의 조각에만 머물지 않고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다른 질료와 다양한 오브제의 만남을 상상력으로 이끄는 조형 실험에 매진하면서 움직임(키네틱 조각), 소리(사운드 아트), 빛(라이트 아트), 시간(노마딕 아트)을 한데 아우르는 중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작업은 뚝심을 기반으로 한 힘의 조각인 동시에, 물질과 오브제의 혼성을 상상력으로 진두지휘하는 실험 조각이자 움직임, 바람, 소리, 시간을 먹고 사는 조각인 셈이다.
김성호 미술평론가
■ 성동훈 작가는
중앙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MBC 구상조각대전 대상(제1회, 1990), 경인미술대전 대상(1990)을 수상했다. 상하이엑스포 한국관 대표작가(2010)를 비롯해 타이완 주밍미술관(2011), 타이완 동호철강파운데이션(2014)의 주관작가로 선정된 바 있다.
성 작가는 영국, 독일,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조각 심포지엄, 예술프로젝트 전시 활동을 했으며, 오스트리아 빈 쿤스트하우스의 한국 현대미술작가 초대 개인전(2009) 등 300여 회 기획전을 열었다.
최근엔 중국, 일본, 타이완 3개국 철강회사에서 철강(100t 무게) 재료와 제작 후원을 받아 조각프로젝트를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중국 최대 철강 생산지 탕산시의 탕산대롱철강, 베이징 랜드아트에서 후원을 받아 공공조각을 설치했다.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성곡미술관, 경기도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부산 올림픽조각공원, 천안 아라리오조각공원, 일본 다쓰카와 시청, 이탈리아 테리촐라 시청과 일본 이와테중앙제철소, 독일 츠비카우조각공원, 창원조각비엔날레 용지공원 등에 120여 점이 소장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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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0909010321120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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